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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D.C.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의 흑요석 벽에 새겨진 이 문구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장성구 명지춘혜재활병원장에게는 아버지의 삶과 맞닿아 있는, 그리고 그가 직접 세계 곳곳의 기념비를 찾아가며 새롭게 체감하는 강렬한 메시지였다.
6·25 전쟁을 공부하며 ‘평화’와 ‘자유’의 가치를 깊이 느낀 장 원장은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에 흩어진 한국전쟁 참전비를 찾아다니며, ‘잊힌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특별한 순례를 이어가고 있다.
자전거에 실린 헌사: ‘호국 의사’의 끝나지 않는 버킷리스트
장 원장의 한국전쟁에 대한 관심과 헌신은 단순한 역사의식이 아니다. 전공의 시절에도 참전 용사들을 한두 분 접했지만, 본격적인 인연은 전문의가 된 후 2000년 2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성애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그는 보훈대상환자 진료를 맡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버킷리스트는 전국에 세워진 6·25 참전 16개국 참전비를 하나씩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이 오랜 소망은 뜻밖에도 코로나19라는 악재 속에서 현실이 됐다. 외부 활동이 극도로 제한됐던 2020년 초부터 4년 동안, 자전거는 장 원장의 유일한 삶의 활력소이자 호국영령을 기리는 도구가 되었다.
주말과 휴일마다 자전거를 타고 서울, 경기, 인천, 춘천 등지의 참전비를 찾아다니며, 그는 ‘자전거 참전비 투어’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호국 영웅들의 뜻을 기렸다. 코로나19가 끝난 지금도 이 습관은 그의 일상에 깊이 남아, 전국 전적지와 참전비를 찾는 여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제 국경을 넘어 세계로 향하고 있다.
아버지의 전쟁, 아들의 순례: 세대를 잇는 기억의 발자취
장 원장의 이 특별한 순례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저의 아버지는 6·25 전쟁 발발 당시 서울 중앙고 2학년이셨어요.”
북한 인민군 점령 하에서 숨어 지내던 그의 아버지는 서울 수복 후, 미 25사단 통역 장교로 일하던 친척의 도움으로 미군 부대에 합류하게 됐다. “처음에는 25사단 취사반에서 밥 짓고 설거지하는 ‘하우스 보이’ 역할을 하셨고, 추워지자 차량 정비반으로 옮겨 정비 보조도 하셨다고 해요.” 비록 전투병력은 아니었지만, 그는 최전선에서 미군과 함께하며 생존을 위한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한국군이 미군 부대 주변 소년들을 강제 징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군 정비병 4명이 5달러씩 모아준 총 20달러를 들고 부산으로 피신했다. 당시 미군 군복을 입고 있으면 무료로 기차에 탈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해군사관학교에 ‘입교’ 한 그의 아버지는 사관생도로서 동해안 연합군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주로 일본 사세보항에서 보급품을 받아 연합군 함정으로 옮기는 일을 하셨는데, 보급품이 바다에 빠지면 건져 올리는 역할을 맡으셨죠.”
장 원장은 웃으며 설명했지만, 아버지가 견뎌낸 고난과 그 속에서도 발휘된 용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이 연합군 해군 작전 참가 이력으로 그의 아버지는 예비역 해군 대위이자 참전 용사로 인정받아 국가의 예우를 받고 있다. 장 원장은 “아버지는 항상 ‘미군하고 싸우면 절대 못 이긴다’고 말씀하셨어요. 미군의 압도적인 보급 능력과 야전 시설 구축 능력을 직접 보셨기 때문이죠”라고 회상했다.
이제 아버지를 대신해, 그는 그 기억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워싱턴 D.C., 런던, 파리… 세계 곳곳에 새겨진 헌사의 기록
장 원장의 해외 참전비 순례는 최근 미국 볼티모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로 이어졌다.
워싱턴 D.C.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은 그 웅장함과 메시지로 장 원장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1995년 완공된 이 공원은 한국의 논을 형상화한 향나무 덤불 사이로 19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병사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장 원장은 “마치 병사들과 함께 전쟁터를 걷는 듯한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흑요석 벽화(Mural Wall)에 새겨진 2,400여 명의 병사 사진과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문구는 가슴을 울렸다.
2022년 새롭게 조성된 ‘기념의 벽’에는 3만6574명의 미군 장병과 7200명 이상의 주한미군 증원군 이름이 새겨져,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게 한다.
기념비 꼭대기의 ‘추모의 연못’은 고요한 명상의 공간을 제공하며, 조각상 들판 북쪽의 ‘유엔 커브’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21개 유엔 회원국의 이름이 새겨져 국제 연대의 의미를 되새긴다.
런던 한국전쟁 추모비는 국방부와 템스 강 사이 야외에 조성되어 있었다. 장 원장은 숙소 인근에서 아침 조깅 중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동상 속 병사의 표정이 고뇌에 차 있어 인상 깊었습니다. 런던 시내 곳곳에 다양한 전쟁 기념물들이 많아 영국의 깊은 추모 문화를 느낄 수 있었죠.”
2014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기증한 이 기념비는 조각가 필립 잭슨이 제작한 영국군 청동상과 웨일스 슬레이트 받침대 위 오벨리스크로 구성돼 있다. 오벨리스크에는 유엔의 첫 집단 행동이었던 한국전쟁의 의미와 영국군의 희생이 상세히 새겨져 있다. 영국은 8만2000여 명이 참전해 1106명이 전사하고, 106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파리 한국전쟁 추모비는 센 강변의 한적한 공원에 조용히 서 있었다. 장 원장은 가족 여행 중, 백화점에 간 가족들을 뒤로하고 홀로 40분을 걸어 찾아갔다.
“1984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 건립된 기념비인데, 한반도 모양의 비석 한쪽에 프랑스군에 배속됐던 한국군인들의 이름이 알파벳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해당 이름들은 프랑스군에 배속되어 전사한 한국군 병사들이다. 구글 맵에는 “한국 분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이라는 한국인들의 긍정적 리뷰도 달려 있었다.
이 기념비는 인도차이나 전쟁 중에도 유엔군 파병을 결단한 프랑스의 역사를 담고 있다. 프랑스는 육군뿐 아니라 1급 식민지형 아비소 ‘라 그랑디에르(La Grandière)’를 파견해 호송, 대잠수함, 대공포 등 해상 작전에도 기여했다. 프랑스 유엔 대대는 두 차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세 차례 미국 대통령 표창, 다섯 차례 프랑스 육군 훈장을 수여받으며 빛나는 전공을 남겼다.
볼티모어의 한국전쟁 기념비는 장 원장의 첫째 딸이 근무하던 메릴랜드주에서 우연히 발견한 공간이었다. 칸톤 워터프론트 파크 끝자락, 바닷바람이 스치는 산책로 한켠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 기념비는 1990년 세워졌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메릴랜드 출신 527명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한 때 기념행사가 중단될 위기였지만, 지역 재향군인회의 노력으로 메모리얼 데이마다 기념식이 이어지고 있다. 단순한 돌판 같지만, 그 위에 새겨진 이름 하나하나가 한국전쟁의 고통과 희생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장 원장은 “항구 도시의 수변 공원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바닥에 한반도 지도가 그려져 있고, 동그란 돌멩이마다 한국전쟁의 주요 흐름과 메릴랜드 출신 전사자 이름이 짤막하게 새겨져 있어, 마치 ‘쇼츠’를 넘기듯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잊힌 전쟁’이 아닌, 현재 대한민국을 만든 역사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장 원장은 한국전쟁을 ‘잊힌 전쟁’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현재를 만든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의 시작을 알렸고, 유엔군이 공식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죠. 현재의 유엔 평화유지군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로서는 8·15 해방보다 더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확고히 만든 큰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산화를 막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확신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죠.”
그는 참전 용사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75년 전,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라는 생각에 숙연해집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수많은 사람의 피로 지켜낸 나라를 잘 가꾸고 번영했으면 합니다. 선배 세대인 참전 용사들에게 큰 빚을 졌고, 항상 고맙고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장 원장은 자신의 딸들이 어느새 6·25 전쟁 당시 전사한 젊은 군인들의 나이보다 많아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어린 나이에 전사하고 인생을 피워 보지도 못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더욱 커진다”고 덧붙였다. 백선엽 장군이 30세에 장군이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젊은 세대의 희생을 오늘에도 깊이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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