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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을 쐬어서인지 기침이 나왔다. 몸이 나른하고 축 처지는 게 감기인 것 같았다. 동이가 판피린을 가져다줬다. 오후 근무 땐 열이 올라서 도저히 일하기가 힘들었다. 동이는 조퇴하고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희숙은 부평역으로 갔다. 부평역에서 유명하다는 하정내과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안에 층수별 업장이 안내판에 나타났다. 3층 하정내과, 4층 하정산부인과, 소아과. 희숙은 3층에서 내렸다.
여긴 남자 산부인과 의사구나. 소아과도 같이 보는군. 내과 의사에게 증세를 말했다. 어지럽고, 메스껍고, 나른하고 미열이 난다고. 의사가 청진기로 희숙의 가슴과 등을 진단하며 물었다. 임신하거나 그런 상태는 아니죠? 희숙이 눈을 꿈뻑거렸다. 혹시 생리 언제 하셨죠? 희숙은 지난달 생리가 없었다는 걸 까맣게 잊었다. 아, 그게 생각 안 나네요. 의사는 청진기를 내려놓더니 위층에 가서 임신 여부를 확인하고 오시라 했다. 임신이면 약을 줄 수 없다고. 희숙의 귀에 쿵, 하고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첩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배란기 때 누굴 만났는지 기억해야 했다. 희숙은 계단을 이용해 4층으로 올라갔다. 설마…. 희숙은 경구용 피임약 부작용 때문에 생리주기법, 질정제 피임법을 겸해서 사용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8주 됐고요, 임신 초기엔 미열이 날 수도 있어요. 감기약 안 드시길 잘했네요. 희숙은 맥이 빠졌다. 당장 결정할 수 없었다. 머리를 정리해야 했다. 수첩을 보니 지난달 배란기 즈음에 만난 사람은 권지호였다. 권지호는 분명히 피임했고. 권지호 만나기 사흘 전에 변태섭과 함께했다.
의사에게 남자가 피임했다고 하니 불량 콘돔일 경우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변태섭은 두 번의 임신중절 이후 피임은 여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만약 변태섭의 아이라면 중절 수술을 받아야 할 거고, 권지호 아이라면…. 권지호가 결혼하자고 할까? 그러면 변태섭과 헤어져야겠지? 차라리 변태섭과 헤어지고 권지호랑 결혼해서 미국 가서 살고 싶다. 권지호가 미국 시민이랬으니 나도 그를 따라 미국 가면 미국 시민이 될 거고 거기서 부모님이랑 동생들 불러서 함께 사는 것도 괜찮겠지.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에게 상처만 준 대한민국은 너무 아파. 희숙은 숙소로 돌아가 보일러 온도를 올렸다.
으스스한 기운이 돌아 두꺼운 겨울용 이불을 꺼내 덮었다. 권지호 아이라면, 권지호는 책임지겠지. 그러곤 결혼하자고 하겠지. 권지호는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부유한 환경에 성격도 모나지 않은, 책임감 강한 사람이었다. 희숙은 권지호의 아이일 거라 믿으며 배를 어루만졌다. 준수한 외모의 권지호를 닮은 아이를 상상하니 모든 게 실감 나지 않았다. 분명히 배란기 때 관계한 사람은 권지호였다. 그 전에 변태섭과 있었다고 해도 3일 전 일이니 상관없었다. 병원에서 배란일을 확인했고 그 시기에 임신 된 건, 권지호가 맞았다.
희숙은 권지호 아이를 가진 게 든든했고 안심이 되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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