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08] 아버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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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5-21 06:23:00

승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여기 있는 사람 다 모르지…? 죽을 죄를 짓고 사는 불효녀 심정을 어떻게 알겠어. 아버지 좋아하는 갈비찜 만들고 사과감주 만들면 죄책감을 덜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난 아버지란 귀신이 제삿날 와서 내가 만든 갈비찜 냄새 맡는 것보다 아버지가 데모하지 말라 했을 때 데모하지 말았어야 했고 자본가 파멸시키자는 구호는 외치지 말았어야 했어. 똥통 학교 때려치우고 유학이나 갔어야 했다고!

제사 때마다 잊었던 나의 죄가 떠오르고, 처참했던 아버지의 마지막이 상상돼서 너무 고통스러워. 아버지를 잊게 해 줘 제발. 엄마도 오빠도 이제 아버지 잊어. 제사 때마다 아버지가 내게 나타나서 말해. 승연아, 너무 뜨거워, 나 너무 뜨거워.

눈물은,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 어느 것도 자책과 회한에서 구제해 주지 못한다는 걸 승연은 알고 있었다. 고통은 피하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것도.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있었어. 친구들처럼 늦게 놀다 들어가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내가 올 때까지 문밖에서 기다리시곤 했지. 언니, 오빠한테는 그렇게 엄하게 하지 않으면서 유독 나한테만 엄격하셨던 게 못마땅했어. 아버지는 늘 야단쳤지. 옷매무새를 반듯이 해라,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마라, 다리는 오므리고 앉아라. 아버지는 내 욕구까지 관리하셨어. 짧은 치마 입지 마라, 학생이 무슨 화장이냐, 화장하지 마라.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춤추러 다니지 마라. 항상 말끝마다 ‘여자가 말이야’ 하시면서.

여고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거기서 굉장한 장면을 봤어. 내 친구가 자기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아빠 얼굴에 뽀뽀하며 장난을 치는 거야.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상상이 돼? 우린 그런 적 없잖아.

난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다지 헌신하거나 희생한 게 없다고 생각했어. 아버지는 회사가 전부였어. 일요일에도 공휴일에도 아버진 회사로 출근했지. 가족과 여행 한 번을 한 적 없잖아. 우리보다 회사 직원 걱정 더 하시고. 회사 기숙사 마련한다고 돈 모으시고. 명절에 직원들 챙겨 준다고 선물꾸러미 준비하시고. 내가 뭐 사 달라면 필요한 거냐, 꼭 사야겠냐 물으시곤 마지못해 지갑을 여셨지. 내가 투덜거릴 때마다 그러셨어. 너희는 부자 아빠가 있어서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옷 사 주고 하고픈 과외까지 다 시켜 주는데 뭐가 더 필요하니?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참 지나고 나니, 아니 결혼해서 애도 낳고 살아 보니까 아버지가 해 주신 게 많더라고.

다정하게 타이르거나 좋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어허, 어디 여자가’ 하며 단속하신 덕분에 밥 먹을 때 소리 내지 않고 단정한 옷매무새로 ‘여자답게’ 자랐지. 허튼 길로 빠지지 않았어. 불편한 절제가 인생의 안전장치였다는 걸 아버지 돌아가시고 안 거야, 바보같이. 아버지를 딱 한 번만 만날 수 있다면, 아니, 아버지 가실 때 곁에 있었더라면 이 말을 했을 텐데.

“아버지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해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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