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22] 까닭 모를 불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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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11 06:30:13

태주가 영등포구청에 들어간 건 오후 3시 경이었다. 승연과 늦은 아침을 먹고 투표소로 향했다. 태주가 약속이 있어 여의도로 향하던 중에 영등포구청 현관 앞에서 불법적인 투표함 반출 시도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귤·빵 등이 들어있는 박스 안에 봉인된 투표함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영등포구청 투표함을 사수하라는 지시를 받고 급히 달려갔다.

태주가 영등포구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학생과 시민이 영등포구청에 몰려든 상태였다. 집권당이 부정선거로 정권을 이어 가려 한다는 야유와 구호가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오후 6시30분경, 영등포구 선관위원장은 ‘불법 투표함’을 인정했지만 30분 만에 중앙선관위가 ‘합법적인 투표함 탈취’라고 발표했다. 학생과 시민들은 부정선거라 규정하고 진상규명과 투표함 보전을 요구했다. 태주는 재빠르게 투표함 사수대를 결성했다.

1조는 투표함 위에 앉았고 2조는 투표함 주위를 에워쌌다. 시민들이 2조 주변에 진을 치며 경찰과 선관위가 투표함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방어했다. 저녁이 되자 민통련 간부들이 영등포구청을 찾아왔다. 검은 두루마기에 흰 머플러를 두르고 나타난 민통련 의장은 영등포구청 부정선거 의혹 현장을 살펴본 후 태주에게 투표함 사수를 당부했다. 군부독재 연장의 꼼수는 통해선 안 된다며.

밤이 되자 찬 기운이 구청 앞마당을 엄습했다. 시민들이 가져다준 모포 몇 장으로 추위를 막았다. 태주는 투표함 사수대 조를 보강했다. 낮부터 모여든 시민들의 수가 천 명을 넘더니 깜깜한 구청 마당에서 선거무효 기자회견을 열 때쯤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태주는 결국은 경찰이 무력을 행사할 것이라 예견했다. 강력한 대선 후보였던 김은, 부정선거 의혹과 관계없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정선거라는 큰 이슈 앞에서 패배를 인정하다니.

시민의 관심이 영등포구청에 쏠리면 공권력도 쉽사리 어쩌지 못할 거라고 민통련 의장은 투표함 사수대에 전갈했다. 17일 낮엔 투표함을 빼내려던 사람이 붙잡힌 상태에서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식은 일파만파로 번졌고 영등포구청은 모여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태주는 밤새워 투표함을 지키느라 피곤했다. 돌아가면서 투표함을 지키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구청 안 구조를 살폈다.

태주는 옥상에 올랐다. 옥상에 책상과 걸상 등 집기 몇 개를 가져다 놓았다. 태주는 건대항쟁 때와 비슷한 그림을 떠올렸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최후 항쟁은 옥상이 될 게 뻔했다. 17일 저녁쯤 태주는 승연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구청 내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승연은 태주가 영등포구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나 했다며 안절부절했다. 승연의 목소리는 불안정했다. 승연은 그에게 그곳에서 빠져나오면 안 되냐, 울먹였다.

빠져나갈 상황이 안 된다고, 어쩌면 오래 걸릴지 모른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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